보육원
비슷한 수준에 있는 사람은 서로를 알게 되기 마련이다. 물론 양쪽 다 비슷한 수준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자는 상대를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자그마치 10년도 넘는 세월 동안, 경쟁은 언제나 일방적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순위에서 여자가 사라진다. 상황의 전말을 알지 못했던 남자는 단순히 기뻐하지만, 얼마 뒤 여자가 보육원을 떠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중학생이 될 무렵, 남자는 그 보육원에서 가장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는 이유로 후계자를 찾는 능력주의 집안에 입양 가게 된다.
1996, 대학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한현수. 대학까지도 당연히 수석 입학일 줄 알았더니······ 차석? 차석? 2등? 내가 2등이라고? 믿기지 않는 현실을 단상에 선 여자를 보고 나서야 겨우 직시했다. 트라우마가 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사실 그전엔 봐줬다는 듯, 따라잡는 것조차 벅차게 압도적으로. 한번 밀린 등수는 여자가 다시 사라지기 전까지 변함없었다. 여전히 자신은 보이지 않는 듯 눈길도 없이 승승장구하는 여자. 은근히 질책하는 눈치인 양아버지. 그러니까 이 모든 건, 강혜린 때문이다. 남들 다 원하는 길이 아닌 자신의 길 선택하는 것도, 그런 길로 보란 듯이 성공해 내는 것도, 전부 최악이다. 남자의 시기는 걷잡을 수 없이 짙어진다. 그래서 여자가 선택한 길과 반대를 걷기 위해 판사를 포기하고 검사가 된 남자. 꼭 여자보다 먼저 성공하겠다는 목표를 가지는데, 여자가 또다시 사라진다.
2008, 이용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이용해 여자의 행방을 알아본다. 겨우 찾은 소식은 여자가 마지막 의뢰를 그만뒀다는 소식. 실패했다는 건가? 강혜린이? 순간 통쾌했지만 그것도 잠시, 걔가 그럴 리 없다는 합리적인 생각이 든다. 필시 생각도 못 한 길로 가려는 거다. 또 혼자서. 몇 달 뒤, 동창회에서 만난 두 사람. 당연히 안 나올 줄 알았는데? 더욱 궁금해진 남자는 여자를 대놓고 긁어본다. 혜린아, 너 마지막 의뢰 실패했다며? 백수 되면 뭐 하려고? 하지만 원하는 답을 얻진 못한다. 그럼 그렇지. 짜증스럽게 구석에서 담배나 피우고 있으니 어느샌가 다가온 여자. 협박은 한순간에 이뤄졌다. ······ 횡령한 건 어떻게 안 거야? 아니, 그전에, 경찰? 경찰이 되겠다고? 돈 벌겠다고 판사 버리고 변호사 된 강혜린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진 짐작도 안 가지만, 여자가 자신을 처음으로, 필요로 했다. 남자는 처음으로 여자에게 자신이 인식된 느낌이었다. 비록 비정상적인 방법일지라도.
2010, 동기
그렇게 강혜린은 정말 경찰이 됐다. 그것도 현장 뛰는 강력반을, 원해서. 경정 달고 반장? 이건 뭐 생태계 교란종을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기상천외한 여자의 행방에 온 신경이 쏟아졌다. 진짜 또라이 같은 자식. 남자는 결국 형사3부로 돌아간다. 그렇게 수차례의 보완 수사 요구와, 수시로 여자의 경찰서를 들락거리며 괜히 시비 걸기까지. 저 검사는 굳이 사무실에 직접 찾아오더라. 경찰들의 수상쩍은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다 여자가 한 사건을 가져오는데, 다른 사건들과는 확연히 다른 반응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이게 단순한 사건은 아니구나. 결국 사건을 끌어와 재판까지 담당한다.